4 MAY, 2009
문이 열려 있었다. 연구실 문이 굳게 닫힌 다른 교수 연구실과는 대조적이었다. 문을 살짝 열고 들어갔다.
이상훈(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가 반갑게 맞이했다.
“저는 학생들이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들어와 이야기하라는 뜻에서 문을 열어둡니다.”
연구실을 둘러보았다. 에릭 클립튼 기타 악보집이 방 한구석에 놓여 있었다.
“취미가 기타 연주지요. 제가 자유분방한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한 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상훈 교수가 ‘장기하와 얼굴들’처럼 자유분방하면서도 게으른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그는 5분 정도의 기타 악보를 무려 1년 동안이나 옮겨 적으며 혼자서 기타를 독학한 독종이다. “단기간의 완성보다 긴 시간 동안 공을 들여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 느끼는 희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지요.”
그래서인지 그가 아이디어를 휘갈겨 적는 큰 화이트 보드의 한 구석에는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명언‘나는 포기하지 않는다’가 적혀 있었다. 포기하지 않는 것이 신조인 젊은 서울대 교수는 이번에 WCU의 지원을 받아 대학원 학과를 개설한다. 뇌인지과학과다.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나다 못해 생생한 느낌을 주는 이 교수는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새로 개설한 학과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WCU(World Class University)사업은 교육과학기술부에서 시행하는 '세계수준의 연구중심대학 육성업'으로, 연구 역량이 높은 우수 해외학자를 유치ㆍ활용하여, 국내 대학의 교육ㆍ연구경쟁력을 세계적 수준(World Class)으로 높이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아울러, 미래 국가 발전과 신 성장동력을 창출할 수 있는 분야의 연구를 활성화하고, 학문후속세대 양성의 기반을 마련하는 새로운 전공․학과 개설 지원과제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 뇌인지과학과를 신설하여 다음 학기부터 학생을 모집합니다. 뇌인지과학과는 무엇입니까? “뇌인지과학은 뇌와 마음, 행동이 어떻게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는가를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마음 및 행동의 생물학적 시스템을 규명하고, 뇌와 행동을 연결하는 학문이지요. 뇌와 마음, 행동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과 행동, 그리고 뇌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 현재 뇌인지과학의 학문적 위치는 어떠합니까? “뇌인지과학은 현재 IT, BT, NT를 잇는 신성장 동력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매년 미국에서 발간되는 과학계 동향 보고서에 의하면 인류에게 가장 필요한 학문으로 융합학문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융합학문 중에서도 뇌인지과학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뇌인지과학은 미래 융합기술의 핵심축으로 인지과학, 인지심리학, 그리고 생물학, 신경과학을 모두 이어주는 교량 구실을 하기 때문이지요.”
- 근 몇 년 사이에 뇌인지과학이 학계에서 굉장히 주목받는 추세입니다. “블루 오션에 가까운 학문입니다. 과거엔 전체 논문 수에서 뇌 인지과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5 -10%에 지나지 않았으나 작년 들어 40%에 육박하는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지요. 현재 외국의 대학은 이런 추세에 맞춰 발 빠르게 연구 환경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미국의 MIT 대학은 뇌과학과 인지과학을 융합한 학부를 만들고 대학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 뇌인지과학이 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뇌 질환에 따른 치매를 조기에 진단해 예방할 수 있습니다. 뇌기능은 멀쩡한데 불의의 사고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람들도 도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뇌의 감각정보처리기능은 멀쩡한데 망막을 손상당해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 감각 정보를 인지하는 인공 센서를 달아, 인공 센서로 인지한 감각정보가 대뇌피질로 전달되도록 할 수 있지요. 그리고 팔이나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들을 대상으로 생각만으로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보조 장치를 개발할 수 있습니다.”
- 인간의 합리적이지 않은 인지 기능을 반영한 사회적 시스템을 개발할 수도 있지 않나요? “물론입니다. 인간의 합리적이지 않은 동선을 고려하여 건물을 설계하고, 신호등을 설치할 수 있지요. 이렇게 뇌의 메커니즘을 이해했을 때 삶의 질은 높아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학과 설립의 가장 큰 이유입니다. 저는 기여라는 단어를 좋아하는데요, 인간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고 미래 사회에 필요한 연구 인력을 양성하는 것이 바로 저와 같은 뇌과학자가 사회에 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여라고 생각합니다”
- 뇌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선 다학제적 연구가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뇌인지과학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들이 함께 모여 뇌의 유전자, 세포, 인지 및 정서적 기능을 각각의 단계별로 이해한 후 서로 연결하는 작업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다학제적인 커리큘럼을 진행하는 정규학과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과 행동, 뇌를 서로 연결하여 세계적 수준의 연구를 해 낼 수 있는 뇌 인지과학과를 개설하였습니다.”
- 그렇다면 학과 개설 목표는? “아까도 말했지만 뇌인지과학과가 중요한 학문으로 성장하고 있는 데 비해 체계적인 교육체계가 마련돼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음 학기에 개설하는 우리 뇌인지과학과는 현재 계획한 커리큘럼을 제대로 진행하고, 학생들에게 장학금과 해외연수 기회를 최대한 제공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세계 학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소수 정예 인력을 길러낼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 학과 개설 사업이 WCU 사업에 선정돼 연간 평균 30 여 억원을 지원받을 예정입니다. 정부가 준 소중한 기회를 잘 활용해 학과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져야겠지요.”
- 학제 및 커리큘럼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우선 학과는 3개의 유닛으로 구성됩니다. 우리 과는 전공이 아닌, 여러 개의 전공이 모인유닛이란 용어를 사용합니다. 'Protein to cognition'유닛과 ‘System & Cognitive'유닛, 그리고 ‘Clinical & Computational'유닛입니다. 'Protein to cognition'유닛은 뉴런 수준에서의 뇌의 작용에 대해 탐구하는 것입니다. 가장 기초적인 부분이지요. ‘System & Cognitive'유닛은 첫 번째 유닛에서 연구한 것을 바탕으로 뇌의 연결망을 탐색하는 작업을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유닛은 치매 등 정신적 질환을 가진 환자의 뇌 구조를 연구해 일반인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밝혀내는 연구를 합니다. 각각의 유닛 당 교수 4명이 있습니다. 뇌 심리, 생물학, 인지과학 등을 전공한 교수들이지요.
- 자칫 잘못하면 유닛과 유닛이 연결되지 않고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을까요? 유닛들이 고립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안도 만들었습니다. 각각의 유닛을 세 개의 원이 겹쳐져 만들어 진 벤다이어그램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벤 다이어그램에 보면 원이 2개씩 겹치는 부분이 3개 있고 가운데에는 원이 3개가 겹쳐져 있습니다. 이것을 본 따 겹쳐지는 부분을 공부하는 과목들을 개설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뇌의 기초 수준인 뉴런에서부터 마음, 행동의 영역까지 잇는 학제 연구를 할 수 있지요. 그리고 우리 뇌인지과학과는 영어강의 수업을 원칙으로 합니다. 깊이 있는 학문적 이해를 끌어내기 위해서, 그리고 한국 학자들 간의 소통을 넘어 외국 학자들까지 포괄할 수 있는 원활한 소통을 끌어내기 위해서입니다.”
- 교수들 간의 협동연구는 어떻게 이뤄집니까? “말로만 그치는 다학제 연구를 지양하기 위해 교수들 간의 연결망을 체계적으로 구성했습니다. 단기간 내의 집중적인 협동연구, 좀 더 장기간 동안 이뤄지는 협동연구, 그리고 외국의 학자들과의 협동 연구 별로 나누어 연결망을 구축했습니다.”
- 그렇다면 학생들은 어떤 커리큘럼을 가지고 공부합니까? “학생들은 메이저 유닛과 마이너 유닛 즉 최소 2개의 유닛을 선택해 공부합니다. 메이저 유닛의 교수 1명이 해당 학생의 지도 교수가 되지요. 지도 교수만이 아닌 다른 2명의 교수도 학생의 멘토가 됩니다. 멘토 교수들은 학생이 연구할 목록을 짜 주고, 공부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으며 수업태도 및 연구 성과에 대한 정기적 평가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그리고 연결망에 의해 해외학자들도 학생들의 공부를 직접적으로 도울 수 있지요.”
plan for education
- 상당히 융합적인 것 같습니다. “그렇죠.”
-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굉장히 치밀한 다학제 연구 시스템인 것 같습니다. “유신시대 당시 만들어진 학과 구분이 지금까지 이어져 학과와 학과 사이엔 넘을 수 없는 담벼락이 형성돼 있지요. 그래서 융합적 학제를 적용할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연구자 층이 굉장히 얇고 협력이 어려웠지요. 저는 다가오는 미래를 이끌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다학제적 커리큘럼을 제공해 주고 싶습니다.”
- 학생들이 비싼 돈 들여서 외국에 유학가지 않고도 융합학문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인가요?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가장 좋았던 점은 교수들 간의 활발한 교류가 체계화돼 있었다는 것입니다. 유학을 가지 않고 한국에서 공부했다면 배울 수 없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내년 여름부터 여름 학교(Summer school)를 열 생각입니다. 해외 교수와 외국의 학생들을 2 - 3주간 초청해 학생들은 그들과 함께 하루 종일 수업하고 연구하는 거지요. 그렇게 하여 후에 그들과 우리가 같이 연구할 수 있는 발판을 다질 것입니다.”
- 뇌인지과학과의 체계적인 다학제 시스템과 여름 학교 프로그램을 통해 학생들의 인적 네트워크가 활성화 될 것 같습니다. “저의 소중한 자산 중 하나가 바로 스탠포드 대학교, 뉴욕대학교 등의 다양한 연구실을 거치면서 알게 된 동료들입니다. 전 세계적 분포망이 형성돼 있지요. 그들의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이번에 연구에 꼭 필요한 fMRI(자기공명장치, 뇌의 신경활동을 관찰하는 기계) 장비를 구입하는 데도 엄청난 도움을 주었지요. 그리고 이메일로 연구 아이디어를 교환하다 보면 연구의 중요한 힌트를 얻기도 해 상부상조할 수 있습니다. 연구 주제가 중복되는 현상도 발생하지 않고요. 생각해 보십시오. 지구 반대편의 친구들과 교류하고, 같이 연구하고, 발표하며 배우는 게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습니까. 이것을 우리 학생들도 느꼈으면 합니다.”
- 이를 통해 과학적 커뮤니티를 형성하려는 것인가요? “저는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의 구조를 신봉하는 사람입니다. 패러다임의 구조 이론에 비추어 보았을 때 현재 뇌인지과학은 이제 굳건히 확립된 패러다임입니다. 뇌인지과학연구가 무너지지 않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경험적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연구를 통해 경험적 데이터를 제공하고, 그것을 검증하는 역할을 커뮤니티가 수행할 수 있지요. 커뮤니티에서 연구 피드백을 주면 해당 분야의 연구가 성장하고, 이것이 쌓여서 뇌인지과학이라는 패러다임의 축적된 결과물이 형성되는 것이지요. 인류는 이것을 통해 수천 년 간 풀리지 않은 의문인 뇌 정신작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지요.”
- 커뮤니티 형성도 과학자가 사회에 할 수 있는 기여 인가요? “그렇습니다. 과학자는 기여를 무시해선 안 됩니다. 국가에서 주는 연구비가 국민 세금이지 않습니까. 돈을 받았으면 사회에 그 이상으로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 과학자의 책무입니다. 저는 커뮤니티 형성이 가장 큰 기여라고 생각합니다.”
- 이 과정을 추진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지난해 5월 초부터 사업을 추진해 약 4개월 동안 직접 미국을 돌아다니며 교수들을 일일이 설득했지요.”
- 뇌인지과학과는 대학원 과정입니다. 학부 수준으로 확대할 생각은 없습니까? “저희학교 심리학과의 이춘길 교수님이 뇌․ 마음 ․ 행동의 연계과정을 개설했습니다. 심리학고, 생명과학부, 언어학과, 컴퓨터공학부 등이 주축이 돼 개설한 연계과정이지요. 이를 대학원의 뇌인지과학과와 연결해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을 생각입니다. 학부생 연구원 제도 등을 통해 협력을 구축하는 거지요.”
- 개설하고자 하는 뇌인지과학과의 롤모델이 있습니까? “일본의 RIKEN 연구소입니다. 10년 전 생긴 뇌과학 연구 센터이지요. 아시아권은 물론이고 세계적인 뇌과학 연구의 롤모델 기관입니다. 대학은 MIT의 Brain and Conitive Science 학부입니다.
- 핵심연구과제는 무엇입니까? “우선 학습과 기억입니다. 과거의 경험이 현재 혹은 미래의 정보처리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기 위해 시냅스의 변화가 학습과 기억에 끼치는 영향력을 탐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감각정보처리가 뇌의 감각피질에서 처리되는 과정을 연구할 것입니다. 뉴런과 뉴런들이 뭉쳐진 부분들 간의 연결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정신분열증을 연구하여 정상적인 뇌에 대한 깊은 이해를 끌어낼 것입니다.”
- 뇌인지과학과에 관심이 있는 고등학생들이 지금 준비했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까? “모든 공부를 다 잘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과학의 언어인 수학공부만은 열심히 해 줬으면 합니다. 뇌과학 연구에 있어서 수학을 못하는 것은 미국에 사는 데 영어를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심리적 차원이고 뇌가 생물학적 차원이라면 수학은 이 두 개의 차원 을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무역에서의 다리가 달러화이듯이 말입니다. 뇌과학자들은 마음을 정량적으로 측정한 것은 수로 번역합니다. 앞으로 이러한 현상은 점점 강화될 거고요. 그러니 뇌, 마음에서 관찰 가능한 현상을 수로 번역해 사고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학부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수학, 물리학 등의 기초학문 공부에 열중하기를 바랍니다.”
- 대학생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 “한국의 학생들은 굉장히 똑똑합니다. 외국의 명문대 학생들에 비해 뒤쳐진다는 생각을 절대로 하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 학생들이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하고 움츠려 드는 모습을 보여요. 좀 더 자신감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약간의 능력과 신념, 그리고 의지를 가지고 무엇이든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하면 자기 자신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아, 그리고 학과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http://bcs.snu.ac.kr 사이트로 오시면 됩니다. 그리고 5월 15일에 뇌인지과학과에서 ‘뇌와 마음 연결짓기’란 주제로 서울대학교 International Conference room(서울대학교 25-1건물)에서 심포지움을 엽니다. 오전 10시 반부터 오후 6시까지 열리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꼭 찾아와주기를 바랍니다. 다음 가을학기부터 뇌인지과학과 신입생을 받는데 현재 서류 제출기한이 5월 13일까지이고 면접은 5월 16일 입니다. 자세한 일정은 http://bcs.snu.ac.kr/wiki/Applying_to_BCS를 참조하세요.”
이상훈 교수는 말했다. “사실 모든 연구 여건이 다 갖춰진 선진국에서 공부하면 더 좋겠지만 우리나라 학생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한국에서 연구하고 있죠. 이것이 제가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사회로부터 받은 것 이상으로 사회에 기여하기를 희망하는 이상훈 교수의 마지막 말을 뒤로하고 연구실을 나갔다. 문은 살짝 열어둔 채.